흙멘탈리스트
세속에서 불리해지면 갑자기 형이상학으로 도망치는 사람들 본문
A: 댁의 아드님이 학교에서 힘 약한 아이들을 때리고 왕따를 시켜서 학폭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증거도 여럿 나왔습니다. 조치 방식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하니 참석해주세요.
B: 어이없네요. 애초에 다른 인간에게 돌을 던질 만큼 깨끗한 인간이 있나요? 사람 다 거기에서 거기인데 제 아들만 죽일놈 만드는 거 뭐죠? 아프리카에서는 독재자들 땜에 오늘도 수만 명이 죽어나갔을 텐데 제 아들이 뭘 그렇게 대역죄를 지었다는 거죠? 게다가 지금 북극에서 빙하가 녹고 있는데 그런 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또 넓게 보면 우리는 모두 기껏해야 우주의 먼지같은 존재인데 이런 게 무슨 의미죠?
A: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B: 아, 선생님은 지금 제 아들 빼고 다른 사람들은 완벽하다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지금 아프리카 독재자를 지지하시는 건가요? 북극 빙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우리가 우주의 먼지라는 진실도 외면하고 싶으신거죠? 그렇게 세상을 좁게 보시니까 제 아들 처벌에만 집착하시게 되는 거잖아요? 제 아들을 처벌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
논점 일탈은 정서적 사기꾼들이 가장 잘 쓰는 대화법 중 하나이다. 특히 고매한 척 하는 나르시시스트들이 잘 쓰는 방법은 위처럼 갑자기 대화의 주제 범위를 부적절하게 확장해 전혀 다른 맥락을 가져오는 것이다. 개그성 과장을 섞은 위의 대화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보이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현실에서도 의외로 많이 접할 수 있다. 이 대화에서 학폭 가해자 부모인 B는 자신의 아이가 학폭 가해자라는 지적에 갑자기 대화의 범위를 형이상학적으로 확장시켜 물타기를 하고 있다. 하나의 구체적인 폭력 사건을 다루는 관점에서 도피해 뚱딴지같이 현재 논점과 전혀 무관한 '지금 현재 세계가 마주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인류의 존재 의미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의 맥락 속에 자신의 아들 문제를 갖다 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화의 초점은 단 한 가지, 그의 아들이 연루된 학폭 문제에 대해 어떤 조치를 해야 할 것인가 뿐이다. 아프리카의 왠 독재자가 잔인한 인종청소를 저질렀다고 한들 그게 본인의 아들과 무슨 상관인가. 그건 대통령이 TV 뉴스 속에서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사적으로 아는 척을 했다고 착각하는 것만큼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비논리적인 비약과 더불어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을 저열한 존재로 깔아뭉개는 인신공격을 감행하기 때문에 의외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 타인에게 웬만하면 비난받고 싶지 않은 인간의 약한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수작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타인의 비난에 의연할 줄 알아야 한다)
정서적 사기꾼/착취자들은 본인이 책임져야 하지만 책임지기 싫은 일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갑자기 형이상학적 구도자가 되곤 한다. 본인이 누군가를 고용해 제대로 급여를 주지 않아놓고 화를 내는 피고용인에게 '돈을 밝힌다'고 뒤집어씌우며 본인은 돈에 초탈한 사람처럼 군다든지, 자신이 명백히 잘못한 일을 지적당해 피할 곳이 없어지면 갑자기 '서로 보듬고 사는 따뜻한 사회' 같은 타령을 하면서 관대함을 요구하거나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를 떠나 우리 모두 반성하자'면서 멀쩡한 상대방 및 주변인을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간다든지 하는 예가 모두 해당된다. 갑자기 형이상학적 구도자가 된 이들 앞에서 법적, 논리적, 세속적 책임 소재를 따지고 드는 것은 쪼잔하고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저열한 짓으로 낙인찍힌다. 형이상학으로 도망가는 화법의 특장점은 단순히 책임만 면피하는 게 아니라 아예 본인이 (세속에 찌들은) 상대방보다 우월한 존재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형이상학적 도피가 만들어주는 우월감에 취해 종종 '남(본인) 욕하기 전에 너 자신부터 돌아봐라', '징징거리고 남(본인) 탓할 시간에 차라리 노오력을 해라'는 식의 주제 넘은 설교까지 늘어놓는다.
나르시시스트가 특히 많은 분야 중 하나로 종교계가 꼽히는 이유도 이것이다. 종교야말로 형이상학적 탈주를 쉽게 만들어주는 가장 좋은 도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러 번 언급했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책임을 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모호하고 불분명한 의사소통을 선호한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상황을 가장 좋아하며, 불분명한 부분이나 주관적인 부분을 자신의 입맛에 맞는 내러티브로 구성해 남에게 강요하는 것을 즐긴다. 때문에 종교는 이런 독버섯같은 나르시시즘에 자양분을 공급하기 쉽다. 그래서 서양 문화권에서 이런 형이상학적 탈출구를 제공하는 사상의 원형은 대개 기독교에서 비롯된다(무조건적 용서 강요, 무조건적 믿음 강요, 구원자 콤플렉스 자극, 회개에 대한 환상, 인간은 신 앞에서 모두 똑같이 죄인이라는 식의 주장, 뇌절에 가까운 사랑과 희망 타령 등).
유일신 종교 전통이 약한 동북아는 어떨까. 동북아권은 모호함을 선호하는 동양 철학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동양 철학'이라 하면 너무 뭉뚱그린 표현이긴 하지만 대체로 유/불/선 문화가 다 그런 편이라 할 수 있다. 과학으로 연결된 서양 철학의 전통과 달리 동양 철학의 기능은 사회적으로 종교에 가깝기 때문에, 이미 사회가 서구화되고 자본주의화된 현재까지도 사람들의 잠재의식에 자리 잡아 서양 기독교 못지 않게 사기꾼 도사의 자양분이 되어준다. 이를테면 노자의 책은 흥미로운 고전이지만 '도는 눈에 보이지 않고 무정형이며 가두는 순간 사라진다'와 같은 메시지가 사기꾼들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노자 사상의 핵심은 '유연함'이며 유연한 판단력을 위한 수양을 권하는 것이지만, 사상의 내용과 표현이 모두 시적이고 외연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것이 '모든 판단을 중지하라'는 메시지로 잘못 읽힐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유교와 불교 역시 외연과 정의가 분명하지 않은 개념으로 가득해 어디에나 전천후로 동원될 수 있다.
보통 나르시시스트들은 누구보다도 세속적 욕망이 강하고 세속에 대한 집착도 심하다. 인정 욕구가 강해 타인 의존적이며 질투심에도 자주 사로잡힌다. 당연히 현실 세계에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법/도덕률을 어겨 책임질 일을 만들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에게 자신의 언행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은 죽기만큼 싫은 일이기 때문에 이들은 자주 말 뿐인 형이상학적 도피를 감행한다. 죄는 세속적으로 지어놓고, 용서는 형이상학적으로 받으려는 것이다. 타인은 인간계에, 본인은 신계에 속한다고 느끼는 나르시시즘의 속성상 이런 특별대접 요구는 당연한 귀결이다.
'흙멘탈리스트 > 한국인의 행복과 불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완벽하게 잘하면 공격받지 않을 거라는 환상 (14) | 2022.10.26 |
---|---|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라는 용어 (5) | 2022.09.17 |
변하지 않는 자가 최고의 기득권자이다 (4) | 2022.09.07 |
합리성이 아닌 자의식 중심의 판단 (1) | 2022.09.03 |
완전무결한 피해자가 되어 게임을 이기겠다는 환상 (16) | 2022.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