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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멘탈리스트/한국인의 행복과 불행

합리성이 아닌 자의식 중심의 판단

Dirt Mentalist 2022. 9. 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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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같은 유일신 종교를 저열한 수준으로 믿는 이들에게서는 유독 주기적인 자의식 세탁 양상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일주일 내내 죄를 지어 놓고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십일조를 내고 예배를 보면 갑자기 성스러워진 기분을 느낀다든지, 어느 순간 무언가 성령적으로 강한 느낌을 받고 회개했다는 주관적인 주장을 내세워 자신을 전혀 다른 새 사람으로 봐주길 원한다든지, 종교에 귀의했거나 신앙이 심화된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자신의 이전 죄는 모두 용서받은 것이라고 선언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내적 신분을 세탁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드러낸다. 이런 유일신 종교에서는 신과 인간이 이분화되어있기 때문에 신에게 의탁하면 불가능한 것이 없고, 인간 세상에서 내가 행한 짓의 의미는 굉장히 축소되어버린다. 신이 용서했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것이다.

유독 종교인들의 이런 자의식 세탁이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나, 비종교인이라고 해서 이러한 면모가 크게 덜하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은 자의식을 팩트가 아닌 해석을 통해 구성하며, 그 해석이 자기중심적이라 자기 입장에서만 말이 되는 플롯인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동대문에서 뺨 맞고 서대문에서 눈을 흘기는 행위는 남이 봤을 때는 황당하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아무렇지 않거나 심지어 그게 공정한 결과라고 믿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나와 타인, 나와 세상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내 입장에서 봤을 때는 총점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한 대 맞았으면 한 대 쳐서 되돌려줘야 하지만 그 대상은 그저 '외부인'이기만 하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고방식이다.

선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직장에서 동료에 대해 헛소문을 퍼뜨리는 비윤리적인 짓을 해 놓고 퇴근길에는 구세군 냄비에 잔돈을 쑤셔넣은 다음 '이 정도면 난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식에게 있는 힘껏 스트레스와 화를 풀어놓고 직장 상사나 부모 앞에서는 비굴하게 굽신거리면서 '난 성실한 시민이자 효자'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선한 사람' 포인트를 쌓는 곳을 임의로, 편의대로 정해놓고 거기에서 포인트를 딴 다음에, 다른 데선 풀어져서 나쁜 짓을 해놓고도 별다른 가책을 못 느낀다. 나쁜 짓이 지나쳐서 '나 정도면 좋은 사람이다'라는 허위 의식이 잠재의식의 위협을 받을 만한 수준에 이르면 또 어디 전혀 상관 없는 곳에 가서 쉽게 '선한 사람 포인트'를 쌓을 생각을 한다.

우습게도 본인이 벌여놓은 나쁜 짓으로 인한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자의식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해결 대상이 아니라 망각 대상이 될 뿐이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게 있어봤자 이런 비대해진 자의식으로 '나쁜 사람 되기 싫은' 심리 수준에 머무르면 진정한 반성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

사회적 사안을 판단할 때도 그렇다. 특정 주장이나 인물을 열렬히 지지해 무뇌아적 빠짓을 하다가 잠재의식 속에 슬슬 수치심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전혀 다른 엉뚱한 부분에서 음모론을 주장하며 균형을 맞추려 든다. 자신이 무엇이든 믿는 무뇌아가 아니라 시니컬하게 불신할 줄도 아는 세련된 현대 시민이라는 자의식을 장착하고 싶기 때문이다. 빠짓에 대한 욕구는 A라는 정치인에 대한 지지에서 채우고 '비판적 사고를 할 줄 아는 똑똑한 나'라는 욕구는 B라는 정치인에 대한 음모론에서 채우는 식이다. 각각에 대한 균형 잡힌 판단을 개별적으로 할 생각은 없다. 자의식 총점만 얼추 맞으면 그만이다.

매사를 판단할 때 이렇게 자의식과 사심을 가득 담으니 본인 말이 틀려도 인정을 못 하고, 남이 다른 의견을 내도 견디지 못한다. 그냥 해당 사안을 잘 몰랐거나 잘못된 정보에 속았다는 건 단순 오류이기 때문에 그다지 창피해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자의식 밸런스 포인트를 위한 판단이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판단 오류는 그냥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기껏 힘들게 쌓아올린 내 자의식을 위협하고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깎는 것이 된다.

CIA나 FBI 같이 수사나 취조를 많이 해야 하는 기관에서, 취조 담당자들이 거짓말 신호 0순위로 꼽는 태도가 있다.
"당신이 이 소녀를 죽였습니까?"
이와 같은 질문에
"전 30년간 모범적 결혼생활을 해 온 가장으로 매주 지역 봉사도 열심히 하고 아동학대 기부금도 꾸준히 내 왔습니다. 주변인들에게 평판도 좋습니다. 증명해드릴까요?"
이런 식의 뚱딴지같은 이야기로 자기 결백을 간접 주장하려는 태도이다. 문제는 이런 태도가 위험 신호 0순위일 만큼 거짓말의 실제적인 징후인데 일반인에게는 심하게 잘 먹힌다는 사실이다. 평소에 동네 평판이 좋았다느니, 그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느니, 나에게 잘해줬다느니 해가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쉴드치는 사례가 좀 많은가.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잘해줘서 내 기분을 얼마나 좋게 만들어줬든간에 그것이 다른 행위에 대한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건 누군가 커피를 안 마시니까 녹차도 안 마실 것이라는 유추만큼이나 부정확하다.

어떤 사안에 대해 그 사안 자체의 성격에 집중해 합리적으로 판단하거나 대답할 생각을 하지 않고 본인의 자의식 충족 기준에 맞춰 답을 내놓는 사고는 어떤 종류이든 동일한 주장을 내포한다.
'나 이런 사람이야. 알아서 기어.'

그러니 기면서 살고 싶지 않으면 그런 판단을 하는 사람은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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