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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것을 욕망하는 세대

Dirt Mentalist 2024. 2. 7.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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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휩쓸리는 트렌드 흐름은 과도한 수준까지 진행된 다음에야 진정되는 경우가 많다. 한 쪽으로 너무 쏠린다 싶다가 역풍이 불기 시작하면 이번에는 반대로 너무 쏠리게 되는 식이다.

 

막말로 중간이 없다. 이는 군중 심리에 크게 의존하는 경기 사이클이나 주식 시장의 양상에도 잘 드러난다. 거시적으로 보면 객관적 경제 지표나 재정 정보 등이 대략 반영되지만 이것이 단 몇 달, 며칠 또는 몇 시간 단위로 정확하게 반영되지는 않는다. 긍정적인 뉴스든 부정적인 뉴스든 언제나 과열 양상으로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데 그러다가 반대 방향의 전망이 우세해지기 시작하면 또 당분간은 반대 방향으로 과열 양상을 보인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그럭저럭 합리적 반영이 되는 것 같아도, 단기적인 그래프는 언제나 들쭉날쭉이다.

 

서이초 교사 사건으로 인해 공론화된 한국 교사들의 현재 근무 여건을 보면, 한국 학교의 교권이 처한 상황도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한때 한국 학교에서는 낮은 학생 인권과 교사들의 갑질이 가장 큰 문제였던 적도 있었다. 그런 학교 생활을 겪은 이들 중 아직 청년층에 속하는 이들도 있으니 그 시절이 그다지 옛날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런데 어느새 상황은 상전벽해 수준으로 뒤집혔다. 교사는 이제 갑이 아니라 갑질을 당하는 위치가 되어버렸다.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분명히 잘못은 아니다. 체벌 금지와 학생 인권 보장은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당연히 함께 진행되어야 할 사안이었다. 또한 동일하게 체벌이 금지되어 있고 학생 인권이 보장된다고 해도 다른 OECD 국가들은 최근 한국처럼 교사에 대한 갑질이 횡행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여러 시사 프로그램에서 제도적인 차이가 지적된 바 있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는 연방 교사 보호법이 있어 교사가 교육 과정에서 하는 행위들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있다. 면책 제도가 있다면 교사들이 적어도 갈등 상황에서 법적 절차의 위협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테니 제도적 차이도 중요한 차이는 맞을 것이다.

 

그러나 교사에게 면책 권리를 준다고 해서 애초에 교사에게 자기 아이 화장실 뒷처리를 해달라거나, 반찬을 골고루 먹는지 구체적으로 관찰해달라거나, 부모가 원하는 종류의 칭찬을 해달라거나 하는 등 학생 개개인의 생활 전반에 대한 맞춤형 독점 올인클루시브 서비스를 요구하는 요즘 일부 한국 학부모식 기대치 자체를 없애줄 것 같지는 않다. 학부모 세대의 인권 의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말이다. 이런 갑질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들에서는 충돌이 일어나고 법적 공방이 일어나기 전에 애초에 교사에게 이런 기대와 요구를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이는 다른 국가 학부모들이 딱히 더 도덕적이어서는 아니다. 개인주의가 발달한지 오래된 나라에서는 개인 간 안전 거리가 중시되고, 어릴 때부터 이런 집단에서 사회화되면 위와 같이 무리한 요구에 대한 발상 자체를 잘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지상파 탐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떤 전문가는 현재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금 학부모 세대는 사실 학교에서 존중을 못 받은 세대이다...그들은 지금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존중이 뭔지 모르겠지만 해달라고 한다. 자신들이 어릴 때 선생님들에게 하던 것을 받게 해달라는 것..."

 

차분한 어조의 말이었지만 실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해달라고 한다'는 사람의 심리는 어떻게 흘러갈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는 굉장히 위험한 상태이다. 웃기게도 이 모든 상황의 출발은 '인권', '민주화', '선진화' 등 새롭고 멋져 보이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벌어졌다. 이것은 사회 발전상 당연히 거쳐야 하는 일이었고 그 자체로는 모두 좋은 가치들이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인 개념은 구체적 해석과 실행에 따라 전혀 다른 사회 양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추상적이니만큼 자기 좋을대로 해석해서 정반대의 헬게이트를 열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국가 명칭을 생각해보라. 그 국가는 정말로 '인민'의 '민주주의'로 작동되는 '공화국'인가? 그리고 현재 학부모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할 한국 40대 및 그 윗세대인 50-60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민주주의, 개인주의, 자유, 인권, 평등 등을 외치면서도 그게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제대로 경험해 본 적 없이 막연한 상상으로 그리는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고 하면 단순히 '(내가) 더 그럴싸하게 대접받는 것' 또는 '(내가) 이익을 보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냥 좋은 소리처럼 들리고, 좋은 거니까 그거 하면 내가 무조건 편하고 이익보겠지 식으로밖에 생각을 못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갈등 관계 자체를 개선하는 게 아니라 역할만 바꾼 채 똑같은 갈등 관계를 재현하게 된다. 모두의 인권이 지켜지는 사회는 개인 간 경계가 명확하고 그 경계를 상호 존중하는 사회이지, 누군가가 타인을 일방적으로 무한 책임지는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과도기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은 인권을 일종의 서비스로, 자신은 그런 서비스를 받는 소비자로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여기에 '손님은 왕'이라는 자본주의적 습관까지 더해지면 진상 중 진상이 탄생하게 된다. 그런 이들이 학부모가 되어 '내 아이의 권리를 지킨다'고 나선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다.

 

지금의 학부모 갑질 문제가 군사부일체를 운운하며 교사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하던 옛 시절과 정반대의 문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학부모 갑질이 선진국 문화 수용 때문에 생긴 문제이지 기존 인습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실상 학부모들의 교사에 대한 갑질은 한편으로는 지극히 구시대적인 현상이다. 웃기게도 '인권', '민주화', '선진화' 등의 새로운 개념의 탈을 쓰고 벌어진 일이지만 막상 그 개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역할만 바뀐 옛날 서열놀이를 그대로 재현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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