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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 잡다 초가삼간까지 태우는 이야기

Dirt Mentalist 2023. 11. 4.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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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베드 버그 관련 팁이나 경험담 아닙니다

 

요즘 한국에서도 베드 버그가 화제가 되는 것 같기에 베드 버그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북미 라이프스타일 차이에 대한 가벼운 뻘글을 남겨 본다.

 

현재 베드 버그 문제는 유럽, 그 중에서도 프랑스에서 가장 극심한 것으로 보이지만 워낙 국제적 이동이 많고 유럽과 교류도 많은 북미 대도시 역시 베드 버그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뉴욕 같은 도시가 가장 심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소위 '선진국'에서 이런 후진적 위생 문제가 발생했는지, 나아가 왜 이 문제를 해결을 안(못)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베드 버그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일반적 위생의 문제와는 별 관련이 없다. 청소, 소독, 살균 등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먹이가 있는 곳에 거주지를 형성하려 하게 되어 있고 이는 벌레, 세균, 바이러스(는 엄밀히 말하면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중간이지만)도 예외가 아니다. 베드 버그의 먹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만 있으면 얼마든지 번식할 수 있다. 유기물 쓰레기와 흙먼지를 잘 처리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베드 버그가 심각하게 퍼진 집들의 사례를 보면 '저 집은 청소를 얼마나 오래 안 한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집이 많아 보이고 눈에 보이는 베드 버그조차도 처리를 한참 동안 안 한 것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베드 버그를 열심히 죽이고 치웠다고 해서 이게 박멸될 가능성은 없다. DDT를 환경/보건 문제로 사용할 수 없게 된 데다가 웬만한 약품에 대한 내성까지 키운 베드 버그가 한 번 도시에 퍼진 지금, 개인 위생 수준을 높이는 수준의 방법으로는 베드 버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두 번째로,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공적으로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아 실망한 사람들이 많은 듯한데 베드 버그 문제를 개인이 해결할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소위 서양 선진국이라는 곳들이 더 심하다. 정부가 하는 일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정부 건물, 대중 교통, 공공 도서관 등의 공공 시설을 관리하는 일이다. 간혹 다양한 사람들이 민원 업무 때문에 많이 들락거릴 수밖에 없는 관공서 건물에 베드 버그가 퍼지면 해당 건물 뿐 아니라 그곳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자택까지 방역 대상에 포함시켜 처리해주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거기까지가 최대 범위이다. 그런데 침실이 존재하지 않는 이런 시설은 사실 베드 버그가 증식하고 확산되는 주요 통로는 아니다. 대중 교통 좌석에서 베드 버그가 발견되면 다들 질색하고 화제로 삼기는 하지만 이런 곳에서 발견되는 베드 버그는 보통 낮은 확률로 어쩌다 누군가의 옷과 가방에 저 혼자 붙어 온 1회성 이벤트로 그친다. 공공 시설을 통한 확산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확산이 지금보다 훨씬 쉬웠다면 정부가 더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그렇지 않으니 손 놓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두 번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일반 시민들의 일상적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일에서 '서양 선진국'들이 사회적/공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을 정하는 범위는 한국인들의 예상보다 좁은 경우가 많다. 아무리 사민주의/사회주의 속성이 강한 나라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사회보장제도는 약자들에 대한 각종 구제 제도나 다양한 이해집단이 가지는 집회/결사의 자유 등에 해당되는 것이지 계급, 인권 등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적 생활 불편 사항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실제로 베드 버그 문제로 정부를 비판하거나 무언가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그다지 크지 않다. 기껏해야 지하철에서 발견이 되면 조금 불평하는 정도랄까.

 

북미를 기준으로 보면, 한국인들에 비해 개인 주택 거주 비중이 월등하게 높고 공공 시설이나 집단 시설에 대한 의존도 자체가 낮은 북미인들의 라이프스타일도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큰 요인으로 보인다. 북미의 중산층들을 기준으로 하자면, 북미인들은 공영이든 민영이든 집단 시설을 이용할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단독 주택에 거주하면서 자기 소유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북미인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외식도 덜 하고, 파티나 모임을 해도 집에서 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연스럽게 바깥에서 만나는 술 약속 등도 현저히 적다. 기본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고 집의 크기가 워낙 크다 보니 이런 저런 활동을 집에서 해결할 수 있어서(또는 집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어서) 생기는 차이이다. 각자의 집에서 웬만한 걸 해결하는 이런 라이프스타일 때문에 북미에는 한국처럼 피씨방, 찜질방, 독서실, 산후조리원 등의 시설이 발달할 수가 없다. 딱히 부유하지 않더라도 북미의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적어도 학생 생활을 벗어나는 20대 중후반 이후로는 대중 교통을 포함한 공공/집단 시설에 생활을 의존할 일이 별로 없다.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이들은 북미 대도시에 피씨방이 없고 산후조리원이 없고 밤늦게 불을 밝힌 호프집이 없으니 북미인들은 게임도 안 하고 산후조리도 안 하고 술도 안 마시나보다, 무슨 선진국이 이렇게 미개하고 재미없냐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겉만 보고 하는 잘못된 판단이다. 예를 들어 북미에도 새벽까지 한국 인싸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까무러치게 노는 젊은이들이 많지만 이들이 '노는' 시설은 강남이나 홍대처럼 집합적으로 불야성을 형성하지 않는다. 밤마다 서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라이브 공연이나 DJ 셋이 열리고, 점잖은 재즈 공연을 즐기려는 중년부부부터 온갖 정신 나간 약쟁이들까지 밤 문화를 즐기려는 모든 유형의 사람들이 출몰하지만 그런 행사나 파티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시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밖에서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일단 도시 밀도가 낮아서 시설과 인구가 산재되는 편이고 해당 시설이 외부로 밝은 조명 등을 밝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 생태계가 한국과는 너무 달라서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북미인들의 생활상은 한국보다 물리적 개인화 정도가 훨씬 심하기 때문에 베드 버그 문제가 심하다고 해 봤자 자기 집에 이미 베드 버그가 옮겨 온 게 아니면 먼 나라 얘기처럼 듣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베드 버그 문제를 '공적'으로 처리한다는 여론 자체가 잘 형성되질 않는다.

 

이건 비단 베드 버그 문제 뿐이 아니라 사회에 보편적으로 배어 있는 정서이다. 한국인들, 특히 편의시설 밀집도와 상호 연결망이 세계 최고 수준인 서울에 거주하던 이들은 이 '물리적 개인화'가 익숙하지 않아 유학이나 이민 생활 초기에 당황하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정서적인 개인주의와는 영역이 좀 다른 문제이다. 비록 좁아 터진 고시원이나 원룸에 거주하더라도 일단 문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큰 이동 없이도 온갖 시설을 통해 외주화된 사회적 자극과 오락을 즐길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북미는 자신이 집에서 DIY로 이벤트를 창출하거나 또는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알음알음 숨겨진(?) 이벤트장을 알게 되어 (주로 서울보다는 먼 거리를 이동해) 수고로이 찾아가서 내부로 들어가지 않는 한, 자동으로 눈에 들어오는 자극이 없고 따라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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