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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멘탈의 자기계발 - 지나친 자학은 무책임이다

Dirt Mentalist 2023. 12. 7.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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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클라이언트로부터 계약을 따내야 하는 한 회사가 있다고 가정하자. 회사는 적절한 스펙과 경험을 갖춘 A씨를 해당 업무의 추진 담당자로 결정했다. 이제 A씨의 임무는 클라이언트에게서 계약을 따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회사는 물론, 해당 업무를 담당할 자신의 개인적 능력도 설득력 있게 어필해야 한다. A씨가 계약을 따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같은 목표를 두고 경쟁 중인 다른 회사의 다른 담당자들보다 자신이 더 해당 업무에 적절하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A씨가 느닷없이 겸손하게 군답시고 자신의 프레젠테이션에서 자신이 아닌 경쟁 업체 담당자의 능력을 상찬하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면? 클라이언트가 '당신이 정말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저는 그다지 잘난 사람은 아닙니다' 따위로 대답을 한다면? '이 일을 맡는다면 성공할 자신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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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례에서 A씨는 단지 자기 자신의 커리어만 무너뜨린 게 아니다. A씨는 자신이 속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 회사 측에서는 나름의 기준으로 A씨가 적합하다고 해서 그를 담당자로 결정한 것인데, A씨가 그 결정을 실패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 자신만 바보로 만드는 게 아니라, 해당 결정을 한 모든 사람들과 조직 자체를 바보로 만드는 짓이다. 

 

자신감보다 겸손을 미덕으로 치는 한국 사회는 종종 '자학 권장 사회'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일상 대화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로를 낙오자, 쓰레기 등과 같은 자기 비하적 명사로 칭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것, '이번 생은 망했다'와 같은 드립이 유행한다는 것에서 이와 같은 면모가 잘 보인다. 자신감을 강조하는 미국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런 식의 유머나 드립을 치는 경우가 많지 않다. 한국의 겸손/자학 권장 문화는 가난 포르노, 불행 포르노식 콘텐츠가 한국에서 유독 잘 먹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겸손 자체는 미덕이다. 하지만 모든 문화가 다 그렇듯이 지배적 어젠다가 물신화되고 화폐화되면 근본적 가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저질 게임을 위한 형식만이 남는다. 피해자 멘탈리티가 강한 한국 문화에서 '피해자 자리 선점하기'가 게임이 되어버린 것처럼, 겸손 역시 모종의 자리 선점을 위한 핑곗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위의 사례는 쉬운 이해를 위해 회사원의 메타포를 사용했지만, 타인의 직접적 개입이 없어보이는 개인적 인생사에서도 이런 멘탈리티는 동일한 효과를 낸다. 

 

겸손, 나아가 자학을 함으로써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익은 무책임해질 권리이다. 나는 어차피 무능력하다, 경쟁력 없다, 이미 망했다고 선언해버리면 기대와 의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더 이상 노력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자신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반성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나는 쓰레기니까,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그랬을 뿐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비난받을 이유도 없게 된다.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자신을 믿어준 사람, 자신에게 일을 맡긴 사람들이 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겸손/자학 멘탈리티에는 이처럼 무서운 무책임함의 면모가 숨어있다. 불행포르노식 콘텐츠를 보면 가끔 출연자들이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존재와 탄생 자체를 저주할 때가 있다. 자학적 정서 자체가 비난받을 문제는 아니지만, 그게 유독 자신의 무거운 책임이나 잘못 앞에서 튀어나오는 경우에는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도박을 하다가 전 재산을 날리고 가족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현재의 불행한 상황을 두고 '애초에 나란 존재가 태어난 게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얼핏 통렬한 반성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본인의 잘못은 도박을 한 것이지 태어난 것이 아니며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문제의 핵심을 의도적으로 빗겨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 교정을 요구했는데 갑자기 존재 부정을 당한 것처럼 구는 것은 논점 이탈이며 도피이다.

 

반성은 어렵지만 자학은 쉽다. 반성은 행동에 대한 것이지만 자학은 존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 교정은 담배 끊기처럼 흔해 빠진 목표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뇌에 새겨진 습관을 바꿔야 하는 것이므로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에 존재에 대한 자학은 행동으로 옮겨야 할 부분이 없다. 그냥 말로만 하면 끝이다.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아무리 정말 '나는 쓰레기'이며 '나는 죽어도 마땅'하다고 입으로 부르짖어도 '그럼 정말 나가 죽어라'라고 진지하게 요구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이런 극단적 존재 부정과 저주는 얄팍할지언정 동정과 도움의 대상이 된다. 자학을 심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사실상 그런 동정과 도움을 바라고 습관적으로 자학을 하기도 한다. 

 

자신감을 권장하는 사회에서 타인에게 호감을 사는 방식이 발전을 위한 욕구와 선망을 자극하는 원리에 기초한다면, 겸손/자학을 권장하는 사회에서 타인에게 호감을 사는 방식은 주로 무해함과 안전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것에 가깝다. 즉,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고 나의 마음을 오로지 편안하게만 만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완전무결한 무해함에 대한 욕구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서로 껍데기 뿐인 과도한 겸손 및 자학을 부추기는 면이 있다.

 

사실 심리적으로 전혀 위협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정신은 단지 폭행이나 살해 협박 같은 극단적 폭력에만 위협을 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넓게 보면 지나치게 매력적인 누군가를 정신 없이 좋아하는 것도, 어떤 목표를 절실히 원하는 것도, 상황 개선에 대한 희망이 생기는 것도 정신적으로는 피로를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위협이다. 뇌가 가장 안전함을 느끼는 때는 현재 익숙한 상황이 지속될 때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원하고 좋아하게 되는 것은 마냥 긍정적이기만 한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리고 노력 투자를 요구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완전한 무해함'과 '완벽한 안정성'에 대한 갈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역설적으로 인생에서 좋은 것과는 멀어지게 된다. 

 

자신의 능력과 좋은 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면 그 수준에 맞춰서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긴다. 때로 자학은 좋은 결과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로 사용된다. 겸손을 지나치게 권장하는 사회는 이를 일견 도덕적인 선택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있는 이상, 지나친 자학은 곧 주변인에게까지 피해를 끼치는 무책임으로 이어진다. 나에게 일을 맡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지, '나보다 잘난 다른 사람들이 많다'는 말 뒤에 숨어 별 볼일 없는 결과에 대한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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