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cidal Jubilee

도둑맞은 원주민 정체성 - 캐나다 가수 버피 세인트-마리

Patricidal Jubilee 2023. 12. 2. 05:51
반응형

성별을 오가는 전청조의 사기가 한국에서 한창 화제에 올랐을 때, 캐나다에서는 인종을 오간 유명인의 사기 스캔들이 화제가 되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버피 세인트-마리(Buffy Sainte-Marie). 

 

Buffy Sainte-Marie

버피 세인트-마리는 아카데미상, 주노상, 폴라리스상 등 캐나다 출신 뮤지션으로 받을 수 있는 굵직한 상은 다 수상한 바 있는 캐나다의 대표 뮤지션 중 한 명이다.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할지라도 캐나다 내에서 상당한 명성, 권위, 명예를 누리고 있으며, 훈장도 받아 OC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다. 현재 80대의 나이이지만 최근까지도 활발한 음악적, 사회적 활동을 지속했기 때문에 여전히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버피 세인트-마리는 원주민 문화와 원주민의 권리에 대해 강력한 발언을 하는 원주민의 대변자 노릇을 해왔다. 

캐나다가 아닌 다른 나라의 대중들에게 버피 세인트-마리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고리는 아마도 1982년의 히트곡 “Up Where We Belong”의 작곡가라는 사실일 것이다. 벌써 40년이 넘었으니 오래된 노래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도 웬만한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클래식 올드팝에 속한다. 이 노래는 1982년에 개봉한 영화 <사관과 신사>의 주제곡인데, 이 영화는 1980년대의 섹스 심벌이었던 리처드 기어의 출세작이다. 톰 크루즈에게 <탑건>이 있었다면 리처드 기어에게는 <사관과 신사>가 있었다고 할 수도 있을텐데, 우연찮게도 둘 다 해군 파일럿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 영화의 주제곡으로 큰 인기를 얻은 덕에 버피 세인트-마리는 그 다음 해에 작곡가로서 오스카 오리지널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이 이력은 아마도 세인트-마리의 이력 중 외관상 가장 화려한 부분이자 경제적으로도 가장 유의미했을 성취이지만, 사실 현재 캐나다인들이 인지하고 있는 세인트-마리의 위상과 이미지를 고려하면 조금은 이질적이다. 현재의 세인트-마리는 원주민 전통 요소가 강하게 가미된 음악을 하고 있으며, 원주민 문화의 대모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 대해 2023년 10월 27일, 캐나다 국영방송인 CBC의 다큐멘터리가 충격적인 내용을 보도했다. 원주민 문화의 자랑이자 동시에 캐나다 대중문화의 기둥으로 여겨졌던 세인트-마리가 실은 원주민 혈통이 1도 섞이지 않은 순수 백인이며 심지어 캐나다인도 아니라는 것. 

 

 

이 스캔들을 단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일명 ‘프리텐디언(pretendian)’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프리텐디언이란, 영어 단어 ‘pretend’와 ‘Indian’의 합성어로 한국어로 직역하면 ‘인디언인 척 하는 사람’ 정도가 될 수 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니면서 원주민으로 행세하는 사람을 뜻한다(참고로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옛날 이야기이고 요즘에는 indigenous라는 표현을 사용). 

왜 원주민이 아닌데 원주민 행세를 하느냐고? 원주민 중 상당수는 아직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흔하지만 역사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 점령인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법적으로는 상당한 보상과 보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문화적, 정치적으로도 백인들의 부채 의식 때문에 발언권과 관심 환기 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보상의 열매를 노리는 이들이 바로 프리텐디언이다.

캐나다에서는 원주민 관련 역사 중 가장 흑역사로 여겨지는 것이 ‘Sixties Scoop’이라는 정부 정책이다. 이는 원주민 아이들을 원 가족에게서 떼어내 위탁 가정과 기숙 학교 등으로 보내 교육시킨 정책으로 일종의 원주민 문화 말살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로 1960년대에 두드러지게 시행된 것이라 ‘60년대 퍼내기’로 불리지만 실은 1951년에 시작되어 1980년대까지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정책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열악하고 폭력적인 위탁 가정과 학교의 처우 때문에 많은 원주민 아이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망했다. 

세인트-마리는 자신이 이 60년대 퍼내기 정책의 피해자 중 한 명이라고 주장해왔다. 자신이 원래는 캐나다 서스캐처원주의 파이아팟 75 보호구역(Piapot 75 reserve)에서 크리(Cree)족으로 태어났으나 두세 살 때쯤 정부 정책 때문에 가족과 강제로 이별하고 미국 백인 가족에게 입양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젊은 시절의 Buffy Sainte-Marie


비록 백인 가정에 입양되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던 세인트-마리는 1960년대에 뮤지션으로 데뷔해 ‘차세대 조니 미첼’로 불리며 미국에서 포크 가수로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고 난 후 자신이 태어난 캐나다 원주민 커뮤니티를 다시 찾았고,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음악을 배우면서 자신의 타고난 정체성을 되찾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세인트-마리는 자랑스러운 원주민 뮤지션으로서 캐나다 원주민 커뮤니티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한 원주민들의 인정 덕분에 세인트-마리는 캐나다 정부에서도 캐나다인이자 원주민으로 인정을 받게 되어 원주민 신분으로 여러 상과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즉, 세인트-마리는 성인이 된 이후에 사후적으로, 문화적으로 원주민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그 신분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세인트-마리를 둘러싼 스캔들의 가장 큰 논쟁 지점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쪽에서는 세인트-마리를 프리텐디언으로 규정한다. 이들 중 일부는 세인트-마리가 여태까지 캐나다인 또는 원주민으로서 받은 모든 상과 지원을 박탈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세인트-마리를 아직도 지지하는 이들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다. 그들은 세인트-마리가 적법하게 원주민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중요한 것은 혈통이 아니라 문화, 그리고 원주민 커뮤니티의 자발적인 결정이라고 말한다. 고향이 어디건, 타고난 혈통이 무엇이건 간에 원주민들이 세인트-마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하고, 따라서 세인트-마리는 생물학적 혈통과 무관하게 원주민이 맞다는 것이다.

누가 원주민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문제가 아니며 혈통만이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정체성을 원주민 커뮤니티 내부가 아닌 외부인, 특히 백인 기득권층이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자체는 옳다. 따라서 세인트-마리가 크리족의 내부 인정을 받았으니 현재로서는 크리족의 일원이라는 주장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세인트-마리가 애초에 그러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혈통에 대한 거짓말에 기인한다면 이는 원인과 결과가 뒤집혀 있는 것이므로 심각한 문제가 된다.

원래부터 세인트-마리가 주장하는 자신의 이야기에는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다. 사실 세인트-마리는 1941년생으로 1951년에 시작된 캐나다 정부 정책과 직접 연관이 있다고 하기에는 타임라인이 맞지 않는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두세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되었다는 이야기를 아무런 기록 없이 당사자의 기억에만 의존해 팩트로 받아들이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세인트-마리가 주장한 자신의 원래 혈통 주장의 세부적 내용도 여러 번 바뀌었다. 크리족으로 주장을 정착시키기 전에는 알곤퀸(Algonquin), 미크마크(Mi'kmaq) 등 여러 다른 부족을 자신의 원래 부족으로 언급했었다. 이 일관성 없는 주장은 그가 수십 년 동안 뮤지션 생활을 해오며 여러 매체와 했던 인터뷰에 그대로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워낙 원주민 커뮤니티에 험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시기라 캐나다에서 자신을 원주민 피해자라 주장하는 이에게 이와 관련된 의심이나 공격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캐나다에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현대적 출생신고 시스템 등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입증이 되지 않는 만큼 반증할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캐나다 쪽에는 세인트-마리에 대한 기록이 없는지 몰라도 미국에는 남아있었고 CBC가 이번에 그것을 취재한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세인트-마리는 1941년 미국 매사추세츠의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이는 미국에서 보관 중인 그의 출생증명서로 증명된다. 그의 출생증명서는 지역 기관에 당시 태어난 다른 아기들의 것과 함께 신고 순서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그가 입양되었다는 기록이나 관련 서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 담당자는 “이 사람은 메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난 것이 100% 확실하다. 다른 경우는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결국 행정 기록상으로만 보았을 때 세인트-마리의 혈통은 순수 백인이자 미국인이며, 캐나다 서스캐처원의 원주민 커뮤니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를 반증할 증거가 없다.

이 보도가 나가자 세인트-마리는 즉각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반박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핵심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내 어머니의 명예를 위해 말하지 못한 사실인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다른 형제들과 아버지가 다를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 말인즉슨, 자신이 원주민 혈통이 맞는데 그 혈통은 어머니의 외도 상대에게서 온 것이라는 말이다. 또다시 증명도 반증도 못할 새로운 가설을 내세운 것인데 제3자로서는 관련자들을 모두 데려다 DNA 테스트를 하지 않는 이상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다만 그가 새롭게 내세운 이 가설은 그 동안 말해왔던 서스캐처원 출생설이나 입양설과 또 다시 논리적으로 충돌한다.

이러한 입장 표명 후 세인트-마리의 공식 웹사이트에서는 그의 고향이 서스캐처원이라는 소개와 ‘크리족 가수’라는 표현이 별다른 설명 없이 삭제되었다.

세인트-마리가 아무리 사후적으로, 문화적으로 크리족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 사실이고, 외부인은 그 적합성을 따질 자격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현재로서 세인트-마리의 전체적인 인생 여정이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원주민 커뮤니티와 너무도 동떨어져 보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보인다. 

생물학적 정체성이 원주민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이 밝혀진 지금, 그가 크리족과 연관될 수 있는 부분은 한때 크리족 커뮤니티를 짧게 방문하고 그 ‘여행’ 일정 중에 그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 뿐이다. 사실상 세인트-마리는 그 이후에도 거의 평생을 계속해서 미국 LA나 하와이 등 캐나다 원주민과는 동떨어진 곳에서만 거주했으며, 현재도 하와이에 거주 중이다. 그가 과연 캐나다 국적을 적법하게 취득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 없이 소문만 무성했는데 2017년에 그는 한 인터뷰에서 캐나다 국적이 없으며 미국 여권만 사용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결국 사실만을 근거로 요약하자면 캐나다 사회와 음악계는 무려 60년 동안,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계속 살아온 순수 백인 혈통의 미국인의 근거 없는 자기 소개만을 그대로 믿고 그를 자랑스러운 캐나다 뮤지션이자 원주민의 대변자로 여겨온 꼴이다. 이 상황에 대해 한 원주민 운동가는 “버피 세인트-마리는 원주민이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믿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논쟁이 지속되고 원주민 커뮤니티도 의견이 갈라져 갈등하고 있는 가운데 현재 파이아팟 원주민 부족장은 "버피 세인트-마리는 언제나 우리 커뮤니티의 일부일 것"이라고 그를 일견 지지하면서도 DNA 테스트를 요구한 상태이다. 이미 너무나 커져버린 버피 세인트-마리의 명예와 유산 때문에 캐나다 사회가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진실과 기만에 대한 윤리적 합의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캐나다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국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원주민과 관련된 역사는 미국만큼 캐나다에게도 아픈 흑역사로 간주된다. 그러나 흑역사에 대한 해결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가해자 측의 부채감과 죄책감, 피해자 측의 보상심리가 감정적으로 흐르면, 이번처럼 그 보상의 열매를 웬 이탈리아 계열의 미국 백인이 가로채버리는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국가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이성적 집행 능력의 결여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