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t Mentalist 2023. 10. 18.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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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가며 가장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나이가 정말 숫자에 불과한 허상이라는 것이었다. 젊었을 때도 '이론적'으로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기성세대가 되어 사회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동세대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1차원적으로 목격하는 것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때문에 진중권이 친구 조국의 온갖 비리를 알게 되고 나서 남몰래 울었다던 고백을 했을 때 그 나이브함에 일견 짜증이 나면서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한 사회의 통념은 현재 그 사회를 이끄는 중장년층의 이데올로기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현재 경제적, 사회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강한 허리층의 취향에 따라 사회가 휘둘린다는 것이다. 현 시점의 사회를 지배하는 사회 통념과 주류 질서에는 생각보다 심오한 의미가 없다. 이를테면 서구권 대중음악에서 아티스트 순위를 꼽으면 비틀스가 항상 1위인 이유는, 그냥 인구빨과 영향력 면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베이비 부머 백인 할아버지들 중에 비틀스 팬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이 음악적으로 반박 불가한 어떤 절대적인 이유 때문에 1위 아티스트로 꼽힌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이건 인류 전체의 역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 물론 인류 문명 자체는 일개 한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살 수 있는 기간보다 훨씬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지식의 축적 덕분에 한 개인의 사고 범위를 크게 웃도는 성취를 보인다. 하지만 그 역사의 주인공으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인간 개개인은 그 이름이 아무리 오래 남아있다 해도 실제 인생은 모두 100년 이하로 산 유한한 존재였을 뿐이다. 그들이 그 길지 않은 세월 동안 성취한 것이 과연 수백 년 뒤 후손들의 생각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을까? 현 시대에도 뛰어난 사람들이 많은데?

 

과연 역사는 그렇게 대단할까. 아무 생각도 없이 남들이 천재라니까 천재인가보다 하고 주워섬겼던 역사 속 인물들은 정말 천재가 맞을까. 고전으로 추앙받는 것들은 그냥 무비판적으로 보고 읽고 떠받들어도 되는 것인가.

 

고전이 고전으로 남은 것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얼마나 유의미하고 합당한지에 대한 것은 가치 판단과 논쟁의 영역이다. '모르면 외워'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논쟁을 터부시하고 빠른 의견 일치와 획일적 목표 설정을 중시하는 한국에서는 비판적 독서가 아닌 맹신적 독서가 기본 독서 태도로 자리 잡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학생 권장 도서 100선' 따위의 리스트가 득보다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다(사실 맹신자의 태도로는 무엇을 읽어도 득보다 실이 크다). 물론 책 뿐 아니라 요즘에는 힙한 지식인들의 준 교양처럼 여겨지는 영화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고전이랍시고 일반적인 대학교 신입생이 다윈의 <종의 기원>을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잘못된 과학 지식을 습득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런 책은 쓰여진 당시의 과학 발달 정도와 사회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없으면 제대로 된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유명한 과학자의 책이라 해도 옛날에 쓰여진 책들은 잘못된 이론을 담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 당시의 맥락에서 왜 그런 잘못된 이론이 나왔고 후속 연구에서 그것이 어떻게 교정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과학이 발전을 해나가는지 그러한 흐름을 파악할 줄 알아야 그게 교양이라고 할 수 있지 수백 년 전 사람이 쓴 책 하나 읽고서 그 내용이 성경인 양 앵무새처럼 재생산하는 것은 교양이 아니다. 

 

실제로 <종의 기원>은 대학생 권장 도서니 뭐니 하는 리스트에 단골 손님으로 포함되곤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대체 선정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오래된 과학 서적은 연구자가 사료로서나 볼 책이지 일반적인 대학생이 교양서로 읽을 책이 아니다. 일반적인 과학 교양을 쌓는 것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저명한 과학 저널의 최신 연구를 읽어보거나, <사이언티픽 아메리칸>과 같이 어느 정도 명성이 검증된 과학 잡지 등을 읽는 편이 낫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제아무리 엄청난 고전이라는 것들도 지금의 눈으로 보면 21세기 국평오보다도 어리석고 야만적인 지점들, 이미 시효가 지나고 예상이 엇나가 지금의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부분들이 어느 정도씩은 포함되어 있다. 반면에 아무리 저질인 것 같아도 동시대에 생산되는 작품들은 지금 현재의 유의미한 문제를 포착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동세대인에게 고전보다 더 유의미한 통찰과 시선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옛날 것에 기대려고 한다. 검증된 것이라는 안정감에 의지하고 싶어한다. 권장 도서 리스트 따위를 정하는 사람들도 십중팔구는 논쟁을 피하고 안전하게 가려니까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일 테다. 그 사람들이 자기 몸 사리려는 사적 의도로 선정한 리스트가 과연 나에게 도움이 되는 독서 리스트일까. 그럴 리 없다.

 

지식은 오늘도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람이 익혀야 할 것은 옛 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에 대한 통합적인 사고일 것이다. 심지어 세상에서 영원 불변처럼 보이는 것일지라도,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은 정적 평형이 아니라 동적 평형으로 유지된다. 파도 위의 서퍼가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끊임없는 적응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듯, 아이러니하게도 움직임과 변화에 대한 인지와 대처 없이는 안정성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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