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정신적 흙탈 맵

고생을 하면 멘탈이 강해질까?

Dirt Mentalist 2023. 7. 28.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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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건강한 부모 밑에서 지원을 받고 자란 A와 학대자 부모 밑에서 어릴 때부터 폭력과 착취에 노출되어 자란 B. 둘 중 누가 멘탈이 더 강할까? A는 온실 속 화초이고 B는 질긴 잡초일까? A는 사회에 나오자마자 환상이 와장창 깨지며 힘들어할 것이고 B는 그 어떤 역경도 강인하게 이겨나가며 끝내 성공하게 될까?

 

질문 2.

한 개인 상점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대학생 C. 상점 주인이 선을 넘는 폭언을 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수시로 한다. 사장이랍시고 아랫사람을 부리는 태도가 가히 전근대 시절 양반이 노예를 대하는 태도 같다. 일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는 C에게 부모가 잔소리를 한다. "고작 그 정도도 못 견뎌서 어떻게 하냐? 그런 일도 버텨내야 강해지는 거야!" 정말일까? 이 일자리를 꾸역꾸역 참아내는 것이 C의 멘탈에 도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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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을 하면 멘탈이 강해진다는 무분별한 믿음은 한국인들의 위험한 착각 중 하나이다. 이런 위험한 착각을 하는 사람들은 질문 1의 B가 겪은 혹독한 양육 환경을 강한 생명력의 원천으로 미화하고, 질문 2의 C와 같은 상황에서 오래 버티는 것을 강한 멘탈의 인덱스로 삼는다. 이런 착각 때문에 어떤 흙부모들은 '유약한 부잣집 애들'에 비해 흙수저인 자신의 자녀가 더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어이없는 희망회로를 돌리기도 한다. 또한 자녀들에게 어디에서든 꾸역꾸역 버티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이와 반대인 경우가 훨씬 많다. 타고난 기질 등의 다른 변수를 제외하고 봤을 때 질문 1번의 A와 B 중 멘탈이 더 강한 쪽은 A일 가능성이 높다. 질문 2에서도 마찬가지로, C가 그 아르바이트 자리를 버텨내는 것은 C의 멘탈에 악영향을 끼치면 끼쳤지 좋은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B와 C가 학습하는 것은 자기 비하와 무기력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럼 멘탈이 강해지려면 '온실 속 화초'가 되는 게 정답이냐고? 아니, 그렇지는 않다.

 

'고생'의 사전적 정의는 '어렵고 고된 일'이며, 사람의 성장과 강화에는 어려움과 고된 조건에 노출되는 것이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나 고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어렵고 고되다는 면에서는 동일한 카테고리로 묶일지 몰라도 의미 면에서는 절대로 묶일 수 없는 것들을 동일시하는 것이 문제다. 무조건 모든 종류의 고생을 무작정 겪는다고 성장과 강화가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운동 시간에 플랭크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버티는 것도 고생이고, 누군가에게 따귀를 얻어맞고 있는 것도 고생이다. 둘 다 똑같은 고생이니까 결과도 똑같을까? 그럴 리가. 전자는 당신을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주겠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고생이 성장과 강화로 이어지려면 생각보다 까다로운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첫 번째, 고생의 강도가 적절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강요당하거나, 자신에게 불가역적이고 영구적인 손상을 남길 일을 떠맡는 것은 유의미한 고생이 될 수 없다. 면역을 만들어주기 위한 예방주사 원리로 생각하면 쉽다. 예방주사는 병원균 원본보다 독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필수다. 자신이 현재 편하게 해낼 수 있거나 견딜 수 있는 조건보다 조금 더 높은 난이도의 도전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이다. 물론 이 '조금 더 높은 난이도'라는 말에 끝없는 해석과 의견차가 뒤따를 수 있겠지만, 긴장감이 1도 없이 편안하기만 하면 난이도를 높이고 정 못하겠으면 난이도를 낮추는 것이 맞다. 자신이 해낼 수 없는 것을 무작정 스스로에게 강요하면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고 실패만이 누적되면 멘탈도 점점 약해진다.

 

두 번째, 반드시 끝이 있거나 희망이 있는 고생이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끝도 없고 희망도 없는 고생은 사람에게 무기력만을 심어준다. 끝없는 절망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것은 의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무언가가 개선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없으면 멘탈이 강해져야 할 이유도 없다. 목적지가 없는 사람이 열심히 뛸 이유가 있을까? 그저 열심히 뛰는 게 도덕적으로 옳으니까 열심히 뛰어야 하는가? 방향도 없는데 열심히 뛴다는 건 어디로 뛴다는 뜻인가? 현재의 고생에 끝이 있거나 적어도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야만 유의미한 고생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수동적인 고생이 아니라 능동적인 고생이어야 한다. 고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얻는 게 있으려면 자신만의 능동적인 행동이 개입되고 그 개입을 통해 상황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본인이 애초에 선택하지도 않았고 개입하는 것도 없이 그저 수동적으로 닥친 환경에 끌려가는 종류의 고생은 사람을 오히려 망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에서 언급한 플랭크 운동과 따귀 맞기의 핵심 차이가 이것이다. 착취적인 사람에게 계속 당하며 '견디는' 것이 유의미한 고생이 될 수 없는 이유도 같다. 착취당하는 상황을 그저 견디고 참는 고생을 통해 당신이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은 단 하나, '착취를 잘 당하는 능력' 뿐이다. 그래서 학대자 부모를 둔 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해서 비슷한 학대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추지 못한 고생은 미래를 더 어둡게만 만들 소모성 고생이거나, 당사자의 성장이나 이득과 아무 관계가 없는 남을 위한 고생일 뿐이다. 그러한 고생에 시달리는 것은 사람을 발전시키거나 강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하지 못한 보상심리만 잔뜩 커지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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