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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 빠진 조언 -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는데 정말일까?

Dirt Mentalist 2023. 7. 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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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적인 부모를 경험한 사람들이 해당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어떤 주변인들은 훈계나 조언을 늘어놓기도 한다. 주변인들의 반응에 많은 신경을 쓰도록 교육받은 한국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일지 모르나, 평범한 사람들이 타인에게 하는 훈계나 조언에는 사실 대부분 알맹이가 없다. 일단 타인의 어려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확한 조언을 할 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도 많지 않거니와, 진심으로 쓸모 있는 조언을 해줘야 한다는 동기 부여가 되는 특별한 관계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착취적 부모의 피해자들이 사회에서 만난 장삼이사들에게 듣는 조언이라는 것은 대부분 아무 자기계발서나 집어들면 볼 수 있는 일반화된 경구 수준이며 실질적으로 별 도움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한 조언 중 하나가 바로 부모를 용서하라는 조언일 것이다. 피해자가 부모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았을 경우, 최고의 복수가 용서이며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역설적 경구를 최고의 지혜인 양 읊는 사람들이 많다.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든지, 용서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계속해서 괴로우니까 결국은 내 손해라든지, 용서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냐든지, 그래도 부모니까 용서를 해야 옳은 것이라든지 등등의 말이 따라온다. 부모에 대한 나쁜 기억 또는 잘못된 양육 방식으로 망가진 무언가 때문에 현재 인생이 괴로운 사람이라면 이런 말이 듣기 싫으면서도 일견 솔깃해지는 양면적 감정이 들 수 있다. 부모가 싫은 것과 별개로 본인의 현재가 너무 괴로우니 만약 억지로라도 용서를 하면 정말 혹시나 내 모든 심적 괴로움이 사라지려나 하는 기대 심리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부모를 용서하면 인생이 술술 풀리기라도 할까 하는 좀 더 미신적인 기대까지 품는 이들도 있다. 정말 그럴까? 부모를 용서하면 괴로움이 해결되고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극복하게 되는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부모든 아니면 어떤 다른 관계에서의 존재든 착취 피해자의 정신적 치유와 극복은 용서와 무관하다. 적어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용서'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감정과는 무관하다. 이는 그렇다고 복수가 극복 방법이라는 말은 아니다. 착취 피해자가 가해자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은 가해자와 그 행위에 대한 객관적이고 메타적인 이해이다. 가해자가 한 행위가 어떤 의미와 맥락을 가지는지 파악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력의 외연을 볼 줄 알아야 그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이해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고 가해자가 자신에게 심어놓은 나쁜 사고 회로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감정 습관을 고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즉, 극복은 나의 내면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지 상대방을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를 용서한다고 선언하건 반대로 복수를 위해 두들겨패건 간에, 그 순간적 이벤트와 일시적인 감정은 피해자의 내면에 있는 착취의 유산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럼 왜 용서가 최고의 복수라느니 하는 말이 그렇게 자주 쓰이는 것일까? 여기에는 정말 조금의 일리도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와 같은 오래된 경구에는 대부분 나름의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말 속에 숨어 있는 가치를 제대로 알아차리려면 먼저 이와 같은 경구의 맥락을 잘 살펴봐야 한다. 

 

일단 정신적 치유 과정에서 용서를 강조하는 것은 그 기원이 서양식(주로 미국식) 심리 치료 방향 및 자기계발론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용서'의 의미가 의외로 동양과 서양 문화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같더라도 문화적 맥락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이런 개념을 무차별적으로 수입해 사용하는 것은 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용서하는 마음을 상찬하는 미국식 문화는 곧 기독교 문화를 의미한다. 기독교 문화에서 용서란 원래 신이 인간을 대상으로 베푸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며 '주여,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라고 외쳤던 바로 그 순간의 심정이 바로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용서' 개념의 원형이다. 이 말은 용서라는 행위가 매우 숭고하게 여겨진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서가 '우월한' 존재가 '열등한' 존재에게 베푸는 은혜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즉, 미국인들의 무의식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 '용서'의 신적인 이미지 때문에 'A가 B를 용서했다'는 상황에서 A가 신적인 존재, 또는 적어도 B보다 우월한 존재로 여겨지는 문화적 코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코드 때문에 미국인들은 자신이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어떤 초월적 존재가 된 듯한 자부심에 뿌듯해하는 경우가 많다. 문화 저변이 그러하니 심리 치료사들 역시 가해자에 대한 용서를 권장하는 것이 상당히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치료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에게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무력한 피해자 멘탈리티를 벗어나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미국인들이 말하는 용서란 한국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자기본위적인 개념이다. 상대방을 좋게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고 선언하기 위해 상대방이 나에게 끼친 피해를 축소시키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한국 문화에는 이러한 집단 무의식적 원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문화를 근간으로 하지 않는 동북아 문화에는 용서를 강조하는 철학 자체가 없다. 유교에서는 용서 개념같은 게 중요하게 등장하지도 않고, 불교는 대놓고 카르마(업보)라는, 어찌 보면 용서와 사뭇 대립되는 개념을 내세운다. 절대신이 존재하지 않는 동북아 문화권에서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어떤 존재가 불완전한 인간의 죄를 추상적으로 용서한다는 식의 세계관이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누군가가 우월한 존재로서 다른 열등한 존재를 용서한다는 사고는 불교에서 매우 오만하고 부도덕한 자세로 여겨지기도 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악행을 감히 '용서'해 줄 자격 자체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피해자의 용서 의지가 미국에서처럼 그 자체로 치료 효과를 가지기 힘들다. 타인에게 관대함을 베풀고 용서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슈퍼히어로가 됐다고 느끼는 미국인들과는 반대로, 그러한 문화적 코드가 없는 한국인들은 '약자인 내가 꾹꾹 참아야지 별 수 있나'라는 식의 굴욕감만 느낄 가능성이 높다. 긍정성을 강조하고 용서를 상찬하는 미국 문화에서는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우월한 자, 먼저 웃는 사람이 승리자이고 반대로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은 패배자라는 인식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지위가 낮고 권력이 없을수록 생글생글 웃으며 부당한 것을 참아야 하고 권력자일수록 마음껏 화를 내며 상대를 몰아부칠 수 있다는 인식이 더 지배적이다. 즉, 미국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관대함이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시혜로 여겨지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한국에서는 관대함이라는 게 반대로 약자이기 때문에 굴욕적으로 참아야 하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도 한국에서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이들은 피해자를 더 숭고한 사람, 그릇이 더 큰 사람으로 봐서 그렇게 한다기보다는 피해자 쪽이 더 약자이거나 더 쉽게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미국에서도 맥락에 따라 용서가 권장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으며, 때로는 심하게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집단 무의식에 예수 그리스도식 용서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해도 미국인들 역시 용서에 대해 마냥 긍정 회로만을 돌리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용서에 대한 긍정 회로 역시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기도 하다. 더 중요한 점은 그 어떤 제대로 된 심리 치료사나 정신과 의사도 이 '용서' 개념에 가해자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가해자와 착취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포함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피해자의 진정한 극복으로서의 용서란 이미 관계가 종결된 뒤 추상적이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가해자라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에 가까우며, 이는 앞에서 말한 가해자에 대한 메타적 이해를 반드시 동반해야 가능하다. 기독교 문화에서 말하는 용서는 어디까지나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베푸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의 가스라이팅이나 착취에 여전히 종속되어 있는 상태라면 애초에 논리적으로 용서가 불가능하다.

 

추상적인 의미의 단어를 사용할 때는 언제나 그 단어의 개념이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매우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용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과연 용서의 정의가 무엇인가? 기원은 무엇인가? 혹시 용서라는 개념을 통해 가해자의 잘못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는가? 가해자와 계속해서 잘 지내야 한다는 압박을 시전하는가? 그런 의미의 용서는 착취 피해자를 한층 더 괴로운 지옥으로 몰고 갈 것이 분명하다. 만약 주변에 그러한 의미의 용서를 강요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자의 조언은 듣지 말아야 한다.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설교를 그럴싸하게 흉내만 낸다고 해서 그러한 조언이 옳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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