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코멘터리

프랑스의 시위를 보는 시선

Dirt Mentalist 2023. 3. 30.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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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연금 개시 연령이 62세에서 64세로 상향될 예정인데 이 때문에 시위가 말도 못하게 일어나 시청에 방화가 일어나는가 하면 전역에 쓰레기가 썩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 시위는 여러모로 매우 프랑스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흔히 북미와 유럽을 묶어 뭉뚱그려 말하는 서구 문화도 아니고, 유럽만을 묶은 유럽적인 문화도 아닌, 순수 프랑스 문화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복지 제도나 사민주의적 마인드 면에서 프랑스보다 결코 뒤쳐진다고 볼 수 없는 이웃 서유럽 및 북유럽인들도 이런 강렬한 시위를 사뭇 신기하게 관찰하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꽤나 지적이고 점잖다는 뉴스 분석에서조차도(심지어 '좌빨' 성향이어도) 시위의 근본 원인을 '(요약하자면) 그냥 프랑스는 원래 그래요!' 식으로 웃어넘기듯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 '프랑스적'이라는 건 뭘까. 나도 살아본 게 아니라 아주 정확하게 인지하기는 어렵다. 주워들은 소리로야 대충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중 봉기와 혁명이 워낙 익숙한 나라이고, 그런 드라마틱한 역사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고, 직업적 정체성보다는 휴가와 노후의 평온함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고, 전통적으로 다른 나라보다 정부에 대해 요구하는 바가 크고 등등. 여기에 좀 더 미시적인 것들도 추가하자면 상징적이거나 요식적인 부분 업종 파업보다는 정말 모두가 다 똑같이 들고 일어나는 연대 파업을 당연시하고(그래서 도시 전체가 마비되지만 그런 불편에 대해 견디는 내성도 높다 - 한국과는 정말로 다른 부분), 사람들의 성향이나 취향이 기본적으로 긍정적/희망적이기보다는 회의적이고 예민한 편(의외로 한국과 비슷한 부분)이라는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리저리 궁리를 해 봐도 이런 추론은 코끼리 다리 만지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만큼 그 나라의 성향이라는 건 맥락을 충분히 알기 전에는 파악하기가 힘들다.

 

한국인들의 프랑스에 대한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은 아마도 홍세화일 것이다. 그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만들어놓은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는 아마도 현재 한국인들의 잠재의식 속에 남은 가장 강력한 프랑스에 대한 이미지일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을 실제로는 거의 읽지 않을 요즘의 젊은이들이들마저도 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 사회의 잠재의식과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특히나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개인의 독서나 리서치를 통해 형성되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주워섬기는 윗세대의 말버릇 같은 것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철학이 매우 발달한 나라이고 프랑스인들의 민주주의 감수성에는 남다른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홍세화가 말한 것과 같은 다양성 존중의 의미로서의 '똘레랑스'는 사실 프랑스를 대표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홍세화를 제외하고는 프랑스가 다양성 존중 차원에서 관용이 넘치는 곳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막상 똘레랑스는 프랑스인들이 그토록 원시적이고 저열하다고 비웃는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나라들에서 더 잘 실행한다고 할 수 있다. 제도적으로도 그렇게 보이고, 역사를 봐도 그렇게 보이고, 양쪽을 다 살아 본 사람들의 증언도 그러했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한 사회의 집단적 관용을 바칼로레아 시험 따위로 월등히 확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호모 사피엔스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한 집단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력은 그냥 다양한 사람을 억지로 기계적으로나마 많이 접해야 '어쩔 수 없이' 높아진다. 따라서 다양성에 대한 수용/관용 수준은 이민자 국가일수록 높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미국인과 캐나다인들은 거의 무의식적 잠꼬대 수준으로 입만 열면 다양성을 이야기하는데, 오히려 프랑스같은 국가는 자신들의 문화적 고유성에 집착하는 면이 강하다. 대외 정책 등에서 프랑스가 미국의 우파적 제국주의와 각을 세우고 보다 다원적인 방향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이와 별개로 일상생활에서의 문화는 그렇다. 이해관계와 완전히 분리된 '철학' 또는 '인문학적 소양'에 따라 움직이는 프랑스의 모습은 586 운동권이 소설처럼 써제낀 판타지 세계관 속에서나 존재하는 프랑스이다.

 

사실 프랑스의 연금 개시 연령은 64세로 올려도 아직 여타 선진국 평균보다 낮다. 62세면 상대적으로 '너무 낮다'고 할 수준이다. 좌빨력에서 뒤지지 않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그보다 더 높은 연령으로 별 갈등 없이 상향 조정한 바가 있다. 시위를 바라보는 타 국가들의 시선이 심각하고 진지하다기보다는 불구경하는 것에 가까운 것도 무리가 아니다. 프랑스 시민들의 시위는 현재 이란이나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급으로 여겨지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프랑스인들의 파업이 보여주는 가치 또한 없지 않은데, 일단 정부가 정말로 재정 마련을 위해 할 만한 일들을 우선순위대로 잘 했는지에 대한 깐깐한 문제제기를 한다는 면에서, 그리고 국민의 뜻을 거스르기가 정말로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또한 모두가 엄청난 불편을 감수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동등하게 파업한다는 면에서 다른 국가가 보여주지 못하는 시민 사회 동력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권력 기관은 끊임없는 감시가 없으면 순식간에 타락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긴장감 유지는 필수이다.

 

물론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타자의 시선에서 프랑스의 시위를 볼 때 그렇게 뜨겁게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마크롱이 예뻐서가 아니라, 타자로서는 프랑스 내부 사정보다도 외부의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 프랑스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장물 보관소처럼 보이는 루브르 박물관의 큐레이터들이 자랑스럽게 파업에 참여한다는 뉴스를 볼 때, 냉소가 안 나온다면 거짓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랑스의 시위를 꽤나 진중하게 다루어주었지만 인간의 분노에 결국 자기 한계와 자기 반복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지프스적 면모가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한 가디언 지의 칼럼은 꽤나 웃긴다(프랑스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은 자기 풍자이기도 하다).

 

"...산업혁명 이후 시대의 경제적 불안과 좋은 직장 부족 상태에 대한 분노. 한때 세계 무대에서 프랑스가 가졌던 힘의 쇠퇴에 대한 분노. 문화적 변화와 국가 정체성의 약화에 대한 분노. 일찌기 카뮈는 <이방인>에서 '분노의 엑스터시'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운이 좋은 국가에 속한다. 대부분의 세계인들보다 나은 상황에 있으며, 좋은 땅을 가지고 있고, 최근에 침략을 당한 적도 없다. 불공정하지 않은가?

마크롱은 안 그래도 불안정한 프랑스인들의 피뢰침이 돼 버렸고, 어떤 의미에서 대통령이라는 직업은 그런 것이다. 이번에는 혁명도, 길로틴도 없을 것이다. 시위는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겠지만 내적인 불만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모든 것에 대한 결론이 났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결론만 빼고.'"

 

프랑스인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일정 부분 그로 인해 영원히 불행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생기는 문제라고 착각 또는 변명해 왔던 한국인들도 이제는 이런 것을 남의 문제로 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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